참 좋은 날씨다. 에어컨 빵빵한 지정도서실에서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내다보기에. 혹은 사이클링 머신에 앉아 발을 놀리며 눈으로는 창 너머 구름을 세기에.
사실 살면서 다이어트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전까진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아무런 걱정 없었는데, 나이가 들며(이렇게 말해도 아직 꺾인 나이 아니다-_-;) 신진대사율이 떨어지고, 단기간에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지방 탓에 한수 접어 내린 결단이었다.
화정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빨린 등록금을 조금이나마 되빨아 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일환... 이자, 5월에 스트레스로 치솟은 체지방을 원상복귀하기 위한 플랜이다. 6월부터 식이요법(약 열다섯 가지의 조항)을 실행하고 있었으나, 스피드가 너무 느린 탓에 방학 끝날 때까지 목표달성이 안될 것 같았다. 적어도 가을엔 니킬을 만날 때의 모슈미처럼 착 달라붙는 블라우스에 실린더 미니, 가죽 롱부츠 차림을 하고 싶었으니까. (<SYSTEM> 섹시한 Ph.D 컨셉을 선택하셨습니다) 현재 해당되는 건 뿔테 안경만이다.-_-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확실히,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좋다. 달릴 때의 기분도, 러닝머신을 내려오면 약간 어질하며 가뿐해지는 것도 좋고, 운동복 등이 땀으로 온통 흥건하게 젖는 것도 좋다. 샤워하고 나오니 피부도 훨씬 매끈해졌다. 가끔 걷고 주로 앉아 있다가 먹고 눕는 육체에 갇혀 있던 생명력이 운동에너지로 뿜어져 나온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기분이 좋으니 많이 먹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역시나 밤엔 배가 고프구나-_-;) 첫날엔 양 다리가 뻐근하고 무거워 고생했는데, 오늘은 날아갈 것처럼 가볍다. 몸도 기분도.
요가도 겸하고 있다. 전자가 지방연소 겸 체력증진이라면, 후자는 달리면서 지친 관절 보살피기. 어쩔 수 없는 머리형 인간이라, 대학에 들어올 땐 머리 아래 달린 몸은 아웃 오브 안중, 인식망 이탈, 있으나 마나였다. 어머 골반, 거기 있었구나. 허리가 이렇게 뻣뻣했군. 발목은 모르타르에 무릎은 시멘트. 대퇴부 고관절은 해체해서 콘크리트 빌딩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지만, 이제는 기역자라든가 산 모양이라든가 코브라라든가 다양하게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인생 살고 볼 일이군요.
관심을 갖는 만큼 애정도 커진다는 말은, 그 대상이 자기자신일 때도 해당되는 것 같다. 침대에 앉아 양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참 예쁘네, 라고 혼자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뭉툭하고 상당히 못생긴 발이다. 험하게 굴린 탓에 발톱도 멍들어 덜렁거리는 게 다섯 개나 된다. 그래도 타지 않게 발등에 매일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씻을 때마다 매만지고, 자기 전에 발목을 돌려 풀어 주면 하얗고 보드라워질 뿐 아니라 오래 걸어다녀도 아프지 않다. 유기체의 일부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생명력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머리형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것도 놀랄 만한 체험이다.
물론, 뭔가 먹고플 때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잡아 자제한다는 건 간질간질하면서도 조금 불편하다. 그래도 정 먹고 싶으면 감자라든가 복숭아 한 알쯤이라면 먹어도 괜찮다. 괴롭혀 가며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으니까. 어제 1킬로 빠졌던 게 오늘 500그램 늘어나도 상관없다. 칼로리 소모와 함께 엄청나게 빠져나간 수분이 다시 돌아온 것 뿐이니까. 하루하루 조금씩 더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건 즐거운 일이다. 식욕이 주는 쾌락을 절제했을 때 얻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조절력에 기인한 만족감이다. 나는 나를 컨트롤할 수 있다. 나는 내 신체를 최적화할 수 있다. 스스로를 신뢰하니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최종목적은 결국, 가볍고 명랑하며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다. 적게 자고 적게 먹어도 생기가 넘치는, 뛰어다니고 춤을 추고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는, 그런 몸으로 살아 있고 싶어서이다. 지방이 조금 늘어났다고 해서 자기 몸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건 정말이지 무의미한 짓이다. 인생은 너무나 짧고 죽음은 등 뒤에 있다. 이 순간만큼은 아직 젊은데, 아직 이렇게 건강해질 수 있는데, 보기에 따라 이렇게 예뻐 보일 수 있는데 어째서?
뭘 하든 중요한 건 사랑의 유무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우리의 행위에 사랑이 깃들어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칸트의 정언명령대로라면, 사랑하라. 남을 사랑하듯 자기자신 역시. 저 멀리 안드로메다의 세계에서 잊혀진 자기자신의 육체 역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