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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たし

새벽의 메모



서울의 밤하늘은 광해로 밝다. 청명한 색의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면 종종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 밤하늘을 볼 수 있을까. 내일 당장 끝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날짜를 새긴다. 잊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은 3월 24일. 오늘은 6월 1일. 오늘은 8월 16일. 결국 다시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슬픔이란, 크기며 모양은 다 달라도 깊이는 같은 것. 고등학교 때의 수첩에 적었던 말이었다. 죄 역시 슬픔과 닮았다. 징역이냐 집행유예냐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나 역시 결국 온실 속 잡초일 뿐으로, 원만하고 좋은 환경에서 성장해왔다. 대외적으로 순탄한 코스를 밟아 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전과에 들어갈, 폭행도 상해도 사기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를 상처입혔다, 고 깨달은 순간. 누군가의 마음을 남용해왔다, 고 깨달은 순간, 그때 쇄도하던 그 절망의 맛을, 나는 결코 잊지 않는다. 아렌이 죽음의 산에서 주운 돌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던 것처럼, 나는 그때 이곳에 적었던 날카로운 슬픔의 흔적을 결코 잊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으로, 그러나, 최소한, 깨닫고 있다면, 불필요한 상처는 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다름아닌 자신의 내면에 진다. 마음을 다친 흔적은 그만큼 강력하다. 상처는 나아도 흔적은 남아 시시각각 그 방향을 바꾸어 간다. 과거의 시간에 남긴 것은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는다. 미래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는 결국 개개인의 문제다.

그때의 무력감을 잊지 않는다. 믿음이 깨진 자리에 남는 상처는 깊다. 상대를 상처입히면 자신도 똑같이 상처입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호감은, 선명한 만큼 부서지기도 쉽다. 지금 나를 향해 웃어주는 미소를, 내미는 손을, 그때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라 여겨 흘려 버렸다. 호의란 공기와 같아 언제나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었다.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려는 온기를, 노력을, 그때의 나는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일어난 일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어떤 순간도 반복되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다면 내일만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짊어지고 가야 한다. 상대가 전하려는 호의의, 호감의, 애정의 소중함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깊이를 지닐 수 있는지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스스로가 근본이 냉정한 인간임을 안다. 오직 노력만이 그 결함을 보완한다. 노력으로 그것을 뛰어넘어, 냉정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언젠가는. 아마도.

살아가며 부대끼는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맡길 순 없다. 대개의 경우 보다 먼 거리에서 약간의 친절함으로 스쳐지나가거나, 혹은 다소 냉정한 인맥이란 이름으로, 혹은 정보의 네트워크란 이름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필요에 의해 예의를 차리고 때로는 거짓 호의를 간파해 적당히 웃으며 거리를 둔다. 허세, 비밀, 침묵, 웃음, 모든 것을 이용하며. 그것이 차라리 자연스럽다.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조금씩은 해나가고 있는, 방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평정을 유지하고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살아남기 위해 행동하는 부끄러움을 알고 때로 슬픔을 알 망정 겉으로는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적어도 0과 1로 이루어진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모두에게 상냥하고 싶다. 댓글이라는 이름으로 달리는 작은 호의에, 최대한으로 충실하고 싶다. 당신의 호의에 보답하고 싶다. 가능한 한. 절대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타인과의 충분한 안전거리가 필요한, 좋은 성적표를 담보하여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제일선으로 요구하며 살아온, 자신의 성향에 반해서라도 달성하고 싶다. 달리는 댓글에 응답하는 게 때로는 괴로워서, 멀리 달아나 있는 것도, 결국 그 때문... 역시 서투르다. 서투르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게 있다... 그러니, 곧, 다시 뭔가 쓰기 시작한 이상, 반드시 모든 댓글에 응답을 하리라고. 그건 내가 아무것도 잊지 않기 때문이라고. 온라인이 아닌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건네는 다종다양한 호의에 일일이 보답하며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라고. 그 때문에 가끔 비관하고 슬퍼진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고. 그런 자신에게 주는 작은 보상. 

아직 어린만큼, 포기에 서투르다. 그러나 포기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도, 살면서 배워가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또한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상처입히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타인의 가슴에 입힌 상처 역시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변명으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어, 아픔을, 무게를, 경험을 온몸에 각인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말이 된다. 그처럼 모든 것을 기억해, 최대한 불필요한 상처를 줄이며, 살아갈 뿐.

언제나 기쁘기만 한 세계는 없다. 그러나 같은 의미로 언제나 슬프기만 한 세계 역시, 없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게 결국 우리들의 일. 실패도, 상처도, 시행착오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도망쳐 있던 지난 봄 적어둔 글이 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스스로의 작은 결함 앞에서 주저할 때이다. 옳은가, 그른가,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달라질 것인가, 혹은 이대로 남을 것인가- 를 갈등하는 그 짧은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실로 매혹적인 체험이다." 그처럼 주저할 때의 사람은 가장 아름답다. 주사위의 6과 1이 난무하는 인생에 그런 아름다움조차 없다면, 어떻게 매일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에서 오는 보람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지.


... 이런 이야기는 오직 글로써 적어둘 뿐이다. 평소에 타인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영역, 자칭 내면의 성소, 스테인드글라스 안쪽, 오직 혼자서만 쉴 수 있는 곳에서 바로 만들어져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독백. 밖에서 타인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결코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그런 곳에선 그에 걸맞는 즐거운 이야기를.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공간에 글로써 남겨지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