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인계 시즌이 왔다. 랩 동료에게 내가 맡고 있었던 학제간 연구비 관리, 콜로키움 잡무, 실험실습비 관리, 수업 및 개인조교를 넘겨주고 BK 연구비 관리를 넘겨받는다. 학진 연구비 관리도 새로 생겨났다. 타이밍을 조절하고 절차만 잘 갖추면 행정일보다 쉬운 건 없다. 오히려 다른 일로 스트레스가 올 때 하나씩 착착 처리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정도다.
우스운 게 하나 있다면- 그 녀석과 9월부터 포지션을 바꾸자고 클리어하게 합의를 봤는데도, 그치는 요번 BK 모임에서 내게도 메일이 갔다는 핑계로 내가 알아서 가 줬을 거라 넘겨짚고 빠졌단다. 아직 자기 일이니 뒷수습이 난처한 건 물론이고, 다른 랩 조교에게도 한 소리 들었단다. "후유에게 제대로 위임도 안 해주고 멋대로 빠지면 당연히 얘가 가겠니?" 어쩔 수 없다. 그 녀석은 매사 이런 식이다. 웬일로 먼저 인수인계를 제안하길래 제법인가 싶었는데, 저 남에게 미루고 싶어하는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책임감이 부족한 동료에게는 상냥하지 못하다. 씩 웃으며 "쯧쯧. 우리, 9월부터 인수인계였지? 그 전까진 각자 알아서 잘 하자, 응?" 이라고 말해 주었다(라고 쓰고 정신적으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차 준 셈이다). 돌아서는 등 뒤로 불만에 가득찬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잘못했으니 뭐라 말대답은 못 하겠고, 자존심은 긁히고, 퍽이나 괴롭겠지. 예전에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한번 크게 걸린 일로 호되게 한 소리 했던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꽤 고분고분 알아서 일을 잘 하는데도 종종 그렇다.
이쪽은 인수인계 매뉴얼과 필요한 서류 정리를 이미 마쳤다. 미리 보내두어 숙지하게 한 후, 담당처 인수인계는 8월 3주쯤에 연락해둘 생각이다. 그 전까지는 계속 본래의 포지션으로 일을 할 테니. 그쪽에서는 잘 해서 보낼지 걱정이다만, 일단 지켜본다.
뭘 하든 계속 자기만 수세에 몰리니 물론 심정은 좋지 않으리라. 알면서도 봐주지 않는다. 네 녀석의 책임이다. 이래서 요즘 착한 후유소요가 못 된다. 쓰게 웃음이 나온다.
- 여전히 많은 것들이 정상적으로 굴러간다. 연구도, 행정잡무도, 사람 만나는 일도, 독서도. 계속 변하고 자라며 습득하고 있다. 일분 일초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냉정하게 따져 지금의 자신만큼 처지가 좋은 대학원생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때로 스트레스를 받고 때때로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된다. 내가 옳다고 믿었고 열심히 습득했던 배움의 방식- 원전의 탐독과 해석은 지극히 인문학적인 스타일로, 이곳에선 별반 의미가 없다. 인간 정신을 계량하는 미시적 정량화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괴로워진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는 셀 레코딩이야말로 진짜 '진리'에 더 가까운 걸 가져다 주지 않을까 말씀하신다. 자의식이나 거시적인 인간행동은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기억이나 주의조차도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옳다고 믿지 않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지도교수의 접근방식을 충실히 배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나는 인지부조화를 인지부조화인 채로 남겨두었다. 남겨두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아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못해 서럽다. 하고 있는 일에서 달아나기 위한 목적으로 일에 매달린다는 게 서럽다. 책을 읽은 만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럽다. 좀더 사랑하고, 좀더 몰입하며, 좀더 기쁨을 맛보는 법을 알고 있는데도 정작 매일의 매 순간을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럽다. 언젠가 말로우가 논한 미지근한 잿빛 불확실성이 내 머리도 쓰다듬어 둥근 공 같은 상아로 만들어 버릴까?
- 연배가 퍽이나 높은 선배에게 말했다. "여긴, 욕구불만의 무덤 같아요."
그분께서는 쓰게 웃었다. "제대로 봤다."
그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든 빛을, 의욕을, 배우는 기쁨을 찾아내어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도 우습게도 난 무섭다. 무서우니까 종종 예전에 들었던 말에서 기억의 가리개를 조심스레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려다본다. 난 언제나 널 천재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본 모든 학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입니다. 내적으로 쌓은 교양의 층도 솔리드합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 그렇게 인정하실 정도면 분명 재능이 있는 겁니다. 그런 말들을 상기하여 두려움을 잊으려는 게 이미 수치스럽다. 수치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요즘 무섭다.
내게는 스스로 짊어진 의무가 있다. 만일 그 말들이 사실이어서 내게 정녕 손톱만큼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그걸 오직 세상을 위해 태우리라고 맹세했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서 가정도, 연애도, 다른 모든 것들을 모두 그보다 하위에 놓겠다고 맹세했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심리적 계약이다. 그러나 정작 내게, 그 '재능'이란 게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발현될까?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이제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긴긴 시간 동안 단련에 단련, 습득에 습득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을 걷고 있으니.
그럼에도 지금 당장 걷고 있는 '이' 길은 아니다. 조금씩 확신이 굳어져 간다.
- 실력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정치를 배워야 한다. 감각을 익혀두어야 한다. 에고를 길러야 한다. 적을 만들지 말되 생긴 적은 목을 비틀어 버려야 한다. 딱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는 버릇처럼 빨리 배우니까.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서 많은 원칙이 그에 수긍한다. 무능하게 남기보단 노회하게 변하겠다. 밟거나 밟히는 선택지밖에 없다면 차라리 전자를 택하겠다. 최악의 경우라면 나의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위의 당위를 이행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는 오히려 운반자, 유전자로서의 생존-기계와 같다. 운반하고자 하는 것을 무사히 운반하기 위해서는 아직 망가지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아 간다면 부디, 가장 중요한 어떤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언덕에서 따온 과일의 정수, 영혼의 표면에 덮인 과분(果粉)이 문질러져 영영 지워지지 않기를. 나는 약합니다. 나는 쉽게 변합니다. 부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2006년, 2007년, 2008년에 맹세했던 많은 것들을 더 먼 미래까지 가져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인격신이 이 소망을 듣고 있기나 할까? 범신론이라면 저 우주가 티끌보다도 작은 개체의 소망 따위 기억해 줄까?
...이런 식이라면 정말로 마냥 명랑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물론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일상을 잘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울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문과도 같은 두 마디를 속으로 외워 본다. 요즘 가장 자주 되뇌는 말이다.
일상의 요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하여,
이것이 번데기 속에서 일어날 법한 융해이길 바란다.
부디.
- 오늘 밤도 생존과 생활의 경계에서 망설인다. 난 그저 레이디 미니버 치비Miniver Cheevy쯤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술담배는 하지 않으며 내일도 일어나서 일을 하리라. 아마도.
- 결국 스스로 구원해야만 한다. 양적 접근방법이 맘에 안 들면 질적 접근방법도 배워야만 한다. 지금의 분야가 맘에 안 든다면 더 맘에 드는 대체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대체물을 위해 따로 공부해야만 한다. 스스로. 오직 스스로.
우스운 게 하나 있다면- 그 녀석과 9월부터 포지션을 바꾸자고 클리어하게 합의를 봤는데도, 그치는 요번 BK 모임에서 내게도 메일이 갔다는 핑계로 내가 알아서 가 줬을 거라 넘겨짚고 빠졌단다. 아직 자기 일이니 뒷수습이 난처한 건 물론이고, 다른 랩 조교에게도 한 소리 들었단다. "후유에게 제대로 위임도 안 해주고 멋대로 빠지면 당연히 얘가 가겠니?" 어쩔 수 없다. 그 녀석은 매사 이런 식이다. 웬일로 먼저 인수인계를 제안하길래 제법인가 싶었는데, 저 남에게 미루고 싶어하는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책임감이 부족한 동료에게는 상냥하지 못하다. 씩 웃으며 "쯧쯧. 우리, 9월부터 인수인계였지? 그 전까진 각자 알아서 잘 하자, 응?" 이라고 말해 주었다(라고 쓰고 정신적으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차 준 셈이다). 돌아서는 등 뒤로 불만에 가득찬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잘못했으니 뭐라 말대답은 못 하겠고, 자존심은 긁히고, 퍽이나 괴롭겠지. 예전에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한번 크게 걸린 일로 호되게 한 소리 했던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꽤 고분고분 알아서 일을 잘 하는데도 종종 그렇다.
이쪽은 인수인계 매뉴얼과 필요한 서류 정리를 이미 마쳤다. 미리 보내두어 숙지하게 한 후, 담당처 인수인계는 8월 3주쯤에 연락해둘 생각이다. 그 전까지는 계속 본래의 포지션으로 일을 할 테니. 그쪽에서는 잘 해서 보낼지 걱정이다만, 일단 지켜본다.
뭘 하든 계속 자기만 수세에 몰리니 물론 심정은 좋지 않으리라. 알면서도 봐주지 않는다. 네 녀석의 책임이다. 이래서 요즘 착한 후유소요가 못 된다. 쓰게 웃음이 나온다.
- 여전히 많은 것들이 정상적으로 굴러간다. 연구도, 행정잡무도, 사람 만나는 일도, 독서도. 계속 변하고 자라며 습득하고 있다. 일분 일초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냉정하게 따져 지금의 자신만큼 처지가 좋은 대학원생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때로 스트레스를 받고 때때로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된다. 내가 옳다고 믿었고 열심히 습득했던 배움의 방식- 원전의 탐독과 해석은 지극히 인문학적인 스타일로, 이곳에선 별반 의미가 없다. 인간 정신을 계량하는 미시적 정량화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괴로워진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는 셀 레코딩이야말로 진짜 '진리'에 더 가까운 걸 가져다 주지 않을까 말씀하신다. 자의식이나 거시적인 인간행동은 둘째치고서라도 당장 기억이나 주의조차도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옳다고 믿지 않으면 나아갈 수가 없다. 지도교수의 접근방식을 충실히 배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여전히 나는 인지부조화를 인지부조화인 채로 남겨두었다. 남겨두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아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못해 서럽다. 하고 있는 일에서 달아나기 위한 목적으로 일에 매달린다는 게 서럽다. 책을 읽은 만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럽다. 좀더 사랑하고, 좀더 몰입하며, 좀더 기쁨을 맛보는 법을 알고 있는데도 정작 매일의 매 순간을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럽다. 언젠가 말로우가 논한 미지근한 잿빛 불확실성이 내 머리도 쓰다듬어 둥근 공 같은 상아로 만들어 버릴까?
- 연배가 퍽이나 높은 선배에게 말했다. "여긴, 욕구불만의 무덤 같아요."
그분께서는 쓰게 웃었다. "제대로 봤다."
그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든 빛을, 의욕을, 배우는 기쁨을 찾아내어 나아가야만 한다. 그런데도 우습게도 난 무섭다. 무서우니까 종종 예전에 들었던 말에서 기억의 가리개를 조심스레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려다본다. 난 언제나 널 천재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지금까지 본 모든 학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입니다. 내적으로 쌓은 교양의 층도 솔리드합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 그렇게 인정하실 정도면 분명 재능이 있는 겁니다. 그런 말들을 상기하여 두려움을 잊으려는 게 이미 수치스럽다. 수치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요즘 무섭다.
내게는 스스로 짊어진 의무가 있다. 만일 그 말들이 사실이어서 내게 정녕 손톱만큼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그걸 오직 세상을 위해 태우리라고 맹세했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 대가로서 가정도, 연애도, 다른 모든 것들을 모두 그보다 하위에 놓겠다고 맹세했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심리적 계약이다. 그러나 정작 내게, 그 '재능'이란 게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발현될까?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이제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긴긴 시간 동안 단련에 단련, 습득에 습득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을 걷고 있으니.
그럼에도 지금 당장 걷고 있는 '이' 길은 아니다. 조금씩 확신이 굳어져 간다.
- 실력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정치를 배워야 한다. 감각을 익혀두어야 한다. 에고를 길러야 한다. 적을 만들지 말되 생긴 적은 목을 비틀어 버려야 한다. 딱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는 버릇처럼 빨리 배우니까.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서 많은 원칙이 그에 수긍한다. 무능하게 남기보단 노회하게 변하겠다. 밟거나 밟히는 선택지밖에 없다면 차라리 전자를 택하겠다. 최악의 경우라면 나의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위의 당위를 이행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는 오히려 운반자, 유전자로서의 생존-기계와 같다. 운반하고자 하는 것을 무사히 운반하기 위해서는 아직 망가지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아 간다면 부디, 가장 중요한 어떤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언덕에서 따온 과일의 정수, 영혼의 표면에 덮인 과분(果粉)이 문질러져 영영 지워지지 않기를. 나는 약합니다. 나는 쉽게 변합니다. 부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2006년, 2007년, 2008년에 맹세했던 많은 것들을 더 먼 미래까지 가져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인격신이 이 소망을 듣고 있기나 할까? 범신론이라면 저 우주가 티끌보다도 작은 개체의 소망 따위 기억해 줄까?
...이런 식이라면 정말로 마냥 명랑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물론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일상을 잘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울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문과도 같은 두 마디를 속으로 외워 본다. 요즘 가장 자주 되뇌는 말이다.
일상의 요철에 함몰되지 않기 위하여,
이것이 번데기 속에서 일어날 법한 융해이길 바란다.
부디.
- 오늘 밤도 생존과 생활의 경계에서 망설인다. 난 그저 레이디 미니버 치비Miniver Cheevy쯤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술담배는 하지 않으며 내일도 일어나서 일을 하리라. 아마도.
- 결국 스스로 구원해야만 한다. 양적 접근방법이 맘에 안 들면 질적 접근방법도 배워야만 한다. 지금의 분야가 맘에 안 든다면 더 맘에 드는 대체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대체물을 위해 따로 공부해야만 한다. 스스로. 오직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