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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백

방백 9: double walking



썰물이 빠져나간 선잠의 모래밭에 두 발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금 더 누워 있으면 도로 잠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가운뎃손가락 언저리가 수상하게 쓰려오는 게 문제였다. 깨닫자마자 어둠 속에서 일어나 문과 창문을 닫고 불을 켜 찡그린 눈으로 날개 달린 타겟을 조준했다. 한 방에 비틀거리며 구르게 한 것까진 좋았는데, 침대 머리맡 어딘가로 사라지는 바람에 도로 들어가 눕기도 애매해졌다. 네 녀석이랑 한 침대 쓰기는 싫다.

상상 속에 존재하며 현실의 우리를 늙게 하는 강의 원천은 생명이다. 생명이 낳는 행위의 연속성이 흐름을 일군다. 꿈의 잔물결에 한창 꽃처럼 피어날 새벽 네 시의 수원水源이 순간, 끊겨, 손끝에 약간의 물기만 남기고 말라 버렸다. 기세 좋게 흐르는 시간에도 시나브로 빈틈은 생겨나고 그 마른 바닥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멍하니 자신을 돌이켜볼 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그 세상은 언제나 바깥보다 안이 더 넓었다. 완전한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정신적 공간, 검고 바래고 자줏빛이 도는 세상은 반쯤 투명한 채 현실에 걸쳐 있어, 일상 속에서 갖가지 잡무로 분투하면서도 여전히 맑은 정신으로 꿈의 한복판을 거닐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일렁이는 환상의 감촉을 만지며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아의 경계에 손가락을 대면 손을 마주 내밀어 화답하는 거울 같은 자신이 있어, 별개의 두 사람은 쌍둥이처럼 서로의 정신적 패리티를 공유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다- 어려운 일이다,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베란다에 내놓은 카랑코에 화분에다 네 광합성의 메커니즘을 설명해 보라고 부탁한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해 줄까?

그 '안'이 팽창하여 자아의 경계를 밀어낸다. 메스꺼움의 근원은 그것이었다. 3월 첫날 이래 작고 검고 뾰족하고 단단한 추 같은 것이 마음에 깊숙이 박혀, 애써 뽑아내려 발버둥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늦었다, 아마도 평생토록.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한밤중에 잠이 깨기 시작한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해 저항하고 또 저항하다 가끔은 잠의 강둑마저 박차고 올라오는 것일까? 저항해야 한다면 다만 웃으며 저항하는 게 좋을 뿐이다. 가끔은 새벽까지 달려 일을 마치고 나서도 억지로 눈을 뜬 채 깨어 있었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 결코 내일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끊임없이 부과되는 새로운 책임을 견뎌내야 하는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 말이다.

내가 나로서 살 수 없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현실 속 상황에서 내려야 할 최적의 선택, 그리고 선택의 결과물이 외현적 자신을 서서히 짓눌러 변형시켜 가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안쪽 세계에 사는 '나', 바깥 세계의 자신보다 더 진실되고 의미 있다고 느끼는 그녀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예전에 성사된 타협의 산물이다. 그런데도 몹시 피로하다. 그 피로는 외현적 자신을 감당해야만 하는 안쪽 세계의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그녀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바깥 세상을 사는 자아로부터 소외당한 채 홀로 정신적 하중을 지탱한다. 모든 인간다운 감정과 상식, 도리라 불릴 만한 것들을 언급하고 행위하는 '나' 역시 바깥 세상 속 일부일 뿐이다. 그러한 '나'조차도 직장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몰이해 속에 고립된 채 지내긴 마찬가지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적당히 감정 없는 관계를 맺으며 지낸다- 그것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태도다. 타자로부터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분리된 두 개의 세상이 일정한 온도와 흐름 속에 있도록 유지해 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지금의 존재를 감당하기 버겁다.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을 택할 수도 있다. 아, 자살은 언제나 최적의 선택지였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미래의 갈래들 중에서 당당히 눈에 띄는 위치를 차지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가능성주의자라고 말한 적 있다. 죽음 역시 상당히 괜찮은 형태의 가능성이다.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느냐- 고 묻는다면, 아마 이 글에 리플이 달리지 않는 (예측가능한 미래의 현실적 일반화. 하하) 이유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이해 불가능하지 않은가. 당신 탓이 아니다. 언제나 늘 그랬다. 슬프게도.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